쑨야오팅(孙耀庭)의 인생스토리

편집국 | 기사입력 2020/05/20 [15:46]

쑨야오팅(孙耀庭)의 인생스토리

편집국 | 입력 : 2020/05/20 [15:46]

 

청나라 말기 마지막 환관이었던

쑨야오팅(孙耀庭)에 대한

중국 기사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구룽(古龙)은 일찍이 "인간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어서,

이 모든 변화는 인류의 작은 빛에 불과할뿐,

시작도 끝도 없으며, 영원한 우주 속에서는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산전수전 다 겪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역사를 돌이켜보면 시대의 발전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수 년전에 시대의 톱니바퀴는

돌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마치 거대한 기계처럼

계속 전진하고 있었고,

모두는 그 안에 있는 작은 나사못에 불과했습니다.

중국도 청나라 정부를 무너뜨리고

신(新) 중국을 건설하는 등

시대의 풍운이 변했습니다.

중국 봉건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시대의 변화에

순응하여 퇴위를 선언하고,

봉건시대를 종식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봉건사회의 특수 산물인 환관도

마지막을 맞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마지막 환관은 해방 후 30년 동안 절에

은거하면서  목욕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다가

영예롭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최후의 환관은 바로 쑨야오팅(孙耀庭)입니다.

 

 

가난한 소년, 거세 후 입궐하다.

광서(光绪) 26년, 쑨야오팅은 톈진(天津) 농촌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집안의 두 번째 아이였고, 아버지는

그에게 '리우진(留金)'이라는

소명(小名)을 지어주었고,

대명(大名, 호적 이름)으로는

그에게 아름답고 좋은 것을 바라는 마음을

기탁하며 쑨야오팅(孙耀庭)이라 지었습니다.

 

쑨 씨네 집은 가난하지만,

쑨야오팅은 세 명의 형제가 더 있었습니다.

집에는 얼마 안 되는 땅과 방 두칸 짜리

집 밖에 없었습니다.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쑨야오팅은 4년 동안 글을 배웠는데,

부모가 마을의 서당 선생님에게

일을 해주었기 때문에

그가 무료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때는 오래가지 않고,

안 좋은 시절이 쑨 씨 가족을 억압하며,

본래도 부유하지 않았던 가정은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집안이 더욱 가난하고 생계가 쪼달리게 되어서

쑨 씨네는 이 아이를 환관으로

보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16년, 쑨 씨네는 소개를 부탁하여

자금성에 쑨야오팅을 보냈습니다.

 

열다섯 살의 쑨야오팅은 생애 최대의

고통을 겪었는데,

그는 아파서 기절하고 또 깨어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는 창 밖의 일광을 보면서 자신은

안개 속에 빠져있고,

미래는 요원하다고 느꼈습니다.

 

 

궁정 생활,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쓰다.

봉건 사회의 산물로, 춘추전국시대에 시작되어

계속 발전하여 명나라에 이르러 환관은 놀랍게도

십만 명에 이르렀고, 청나라의 환관도

이천여 명이었습니다.

 

청나라 통치가 위축된 후, 쑨야오팅은 공교롭게도

마지막으로 입궁한 환관으로,

중국의 마지막 환관이었습니다.

 

쑨야오팅은 궁중에서 경험도 많습니다.

그는 더샹(德祥)의 환관을 통해 궁에 들어갔는데,

더샹이 궁중에서 매우 지위가 높았고,

쑨야오팅이 입궁하고나서,

살얼음판 같은 궁궐에서 살아남으려면

더샹을 잘 따라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쑨야오팅은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영리하며, 말솜씨가 뛰어나

곧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입궁 후 이듬해인 음력 2월, 광

서 황태비 단강(端康)은

연극을 보다가 더샹 밑에 아주 재치있는

소환관이 있다는 말을 듣고

쑨야오팅에게 극단에 참가하라고 명했는데,

다른 것보다도 궁에서 늙어죽을때까지

이름없이 살다가

죽은 환관들도 많은데 이것은 쑨야오팅에게

막대한 영광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연극반에서 몇 달을 보낸 후, 쑨야오팅은 몇 십개의

백은(白银, 고대의 화폐)으로 왕성상(王成祥)을

구입했고, 그는 사방(司房)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방은 환관의 관리를 맡은 곳인데,

쑨야오팅은 그 안에서 아첨하고,

수 년간 고생하며, 몇 년간 일하다가

다시 돌아가면서

황후를 보살피는 자리에 발탁되었습니다.

 

쑨야오팅보다 몇 살 아래인 이 황후는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고,

그녀의 환관으로서 쑨야오팅은 항상 그녀를

데리고 놀았습니다.

그는 늘 눈치를 살피고 사람의 뜻을

잘 이해했으므로

매우 완곡한 환심을 샀습니다.

 

푸이(溥仪, 청나라 마지막 황제)에 대해

쑨야오팅은 나중에

"그는 매우 변덕스러운 사람이고,

나는 그를 매우 두려워했다."고

회상했습니다.

궁정에서 근소하고 세심했던 쑨야오팅은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전력으로 몸부림쳤습니다.

풍운이 돌변하여 유랑하다.

시대의 풍운이 돌변하고,

부패한 봉건사회를 타파하는 것은

마치 거품과 같아서 찌르는 대로 파괴되었습니다.

1924년, 핑위샹(冯玉祥)이 상경하여

황제 푸이를 자금성에서 쫓아냈습니다.

궁중의 대란으로 모두가 위험하게 되었는데,

궁 안의 모두가 이제 어제와 같은 날들은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청나라 조정은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쑨야오팅은 이에 따라 완곡하게

출궁하려고 하였는데,

황후를 몇 달 동안 모신 후,

그녀가 도망친 푸이를 찾아가자

결국 쑨야오팅은 이렇게 환관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미래의 길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릅니다.

쑨야오팅은 예전에도 앞길이

불투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는 먼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농사일을 할 수도 없었고

땅도 없어서 형제들의 도움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작은 시골에서 특이한 사람으로 보는

시선을 많이 받기도 하고,

호기심과 빈정거림, 동정을 받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쑨야오팅은 고향에 더이상 머물지 못했고,

그는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북장거리(北长街)의

흥륭사(兴隆寺)에 몸을 의탁했습니다.

흥륭사에는 40여 명의 환관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에 돈이 있는 사람들은 집을 사서

임대료를 받아서

모두가 먹고 마실 수 있게 했습니다.

쑨야오팅은 두 끼를 맛있지는 않지만

배불리는 먹을 수 있었습니다.

 

날이갈수록 어려워지자, 쑨야오팅은 살기 위해

길거리를 떠돌며

쓰레기를 주워 돈을 벌었습니다.

이 떠도는 나날은 고생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시대에 적응하고, 태연자약하다.

다행인 것은, 해방되자 쑨야오팅은 결국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해방되면, 우리 환관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쑨야오팅은 흥분하여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부는 이들 환관들을 관리하면서 매달 16위안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나중에는 일자리를 주선하였으며,

쑨야오팅은 베이징시의 사찰 관리를 맡았습니다.

마침내 날이 밝아지자 쑨야오팅은

열심히 일하였고,

매우 만족하였습니다.

 

쑨야오팅은 어떤 나쁜 악습도 없었고,

사람들에게도 매우 친절했으며,

그는 정부에 대해 항상 감사함을 가지고

일하면서도 게으름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청나라의 멸망을 목격하고,

신중국의 굴기(崛起)를 확인하며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내도 자식도 없는 쑨야오팅은

외로울 때도 있었지만,

지금의 삶을 갖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고,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쑨야오팅은 자신의 노력으로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데,

아무도 그가 한때 환관이었다는 이유로

그를 차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쑨야오팅은 항상 마음 속에

응어리를 품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신체의 일부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는 항상 목욕하길 싫어했습니다.

 

궁중에서의 생활을 회상하며,

쑨야오팅은 아쉬움도 있고 한숨도 있으며,

마음에서 지우고 싶기도 했습니다.

1996년, 94세의 쑨야오팅이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 전에 그는 모두에게 그를 씻기지 말고

체면을 차리고 떠나고 싶다고 말했고,

모두가 그의 뜻을 존중했습니다.

 

쑨야오팅, 이 중국 봉건사회의 잔존 인물은

일생동안 기구한 운명으로, 궁중에서 억압을 받고,

사회에서 차별을 받았지만,

결국 자신의 노력으로 다시 존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불쌍한 인물이면서 또한 가치있는 사람이고,

경탄받을만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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